2020년 개봉한 영화 미나리(Minari)는 단순한 이민 가정의 이야기를 넘어, 정체성과 가족, 삶의 본질을 다층적으로 탐색한 작품입니다. 특히 영화 제목이기도 한 ‘미나리’는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상징으로 작동합니다. 미나리라는 식물 하나를 중심으로 물, 땅, 그리고 생명의 순환이 상징화되고, 이민자의 삶과 연결되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이번 글에서는 영화 미나리 속에서 등장하는 상징물들 특히 물과 땅, 미나리가 어떻게 서사와 감정,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물의 흐름과 생명의 순환 – 미나리가 자라는 조건
영화 미나리에서 물은 생명의 근원이며 동시에 희망과 재생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미나리 식물이 자라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은 바로 ‘물’입니다. 영화에서 할머니 순자(윤여정 분)는 손자 데이빗을 데리고 숲속 개울가로 가서 미나리를 심습니다. 그 장면은 단순한 식물 재배가 아니라, 문화와 생명의 뿌리를 내리는 의식처럼 연출됩니다. 이때의 ‘물’은 미국 땅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한국인의 뿌리를 이어가는 매개체로 등장하며, 흐름이라는 속성을 통해 희망의 지속성을 암시합니다.
순자가 말하듯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고, 아무 데서나 뿌리를 내리고, 두 번 자란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물은 미나리가 가진 생명력의 지속성과 복원의 상징으로서, 이민자 가족이 겪는 고난과 회복을 은유합니다. 영화 내내 반복되는 우물 장면과 트레일러 파이프의 물 문제도 단순한 생활고를 넘어서, 생존과 정착의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제시합니다. 아버지 제이콥이 땅을 파서 직접 우물을 만들고 농장을 일구는 모습은 물이라는 상징이 어떻게 가족을 살리고 미래를 만드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영화 후반부에 순자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 집에 불이 나고 모든 것이 무너진 후, 다시 미나리가 자라난 개울가 장면이 보여집니다. 이는 ‘물’이 파괴 이후에도 생명을 재생시키는 힘으로 존재함을 나타냅니다. 물은 시간의 흐름과도 닮아 있습니다. 격변의 시간을 지나도 물은 흐르고, 그 속에서 미나리는 또 자랍니다. 이처럼 영화 속 물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서사의 구조 속에서 순환성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핵심적 장치로 작동합니다.
땅 - 정체성과 이방인의 뿌리 내리기
미나리에서 땅은 물리적 공간이자 정체성을 투영하는 장소입니다. 이민자인 제이콥 가족이 정착한 미국 아칸소의 시골 땅은 한국의 고향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며, 도전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낯선 공간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땅에 ‘농장’을 일구는 것, 즉 뿌리를 내리는 시도는 단순한 경제활동 이상의 정체성 확립 시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이콥은 생계형 닭 성별 감별사로 일하며 안정된 수입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땅을 일구고 작물을 키우는 것을 통해 가족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려 합니다. 이 땅은 그에게 ‘가능성’이며 동시에 ‘투쟁’의 공간입니다.
하지만 그 땅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건조하고 바위가 많으며, 물도 부족합니다. 트레일러도 안정된 주거공간이 아닌 임시거처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이민자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외롭고 고립되어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가족 내의 갈등은 이 땅 위에서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몬리카(한예리 분)는 아이들을 위한 안정된 삶을 원하지만, 제이콥은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성취를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 같은 갈등 역시 땅 위에서 벌어지는 ‘정착’과 ‘이탈’의 갈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끝에서 결국 미나리가 무성하게 자라는 장소는 가족이 애써 농사를 지은 밭이 아닌, 순자가 조용히 심어놓은 개울가의 그늘진 땅입니다. 이는 인간이 뿌리내리고자 애쓰는 땅이 반드시 생산성과 효율성 위에 존재할 필요는 없다는 역설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자연의 흐름과 인간의 관계, 땅과 삶의 균형은 자본이나 성취가 아닌 ‘공존’의 개념에서 출발해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땅은 인간이 정복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간임을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미나리 – 한국인의 정체성과 생존력
영화의 제목이자 핵심 상징인 ‘미나리’는 한국인의 정체성과 생존력, 그리고 조용한 저항의 은유로 기능합니다. 미나리는 한국인에게 매우 익숙한 나물 중 하나지만, 영화 속에서는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깊은 상징성을 지닌 식물로 재탄생합니다. 물가에서 잘 자라고,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 자라는 그 특성은, 낯선 미국 땅에서 끈질기게 뿌리를 내리는 이민자의 삶과 정확히 닮아 있습니다. 미나리는 억세지 않고 연하지만, 그 안에는 굳센 생명력이 있습니다.
특히 미나리는 할머니 순자와 연결되며, ‘한국적인 여성성’과 ‘조용한 저항’의 이미지로 확장됩니다. 순자는 미국식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때로는 실수를 저지르지만, 아이들에게 따뜻한 정서를 주고, 미나리를 심으며 생명의 순환을 전합니다. 순자의 존재는 곧 미나리의 속성과 닮아 있으며, 말없이 가족을 지탱하는 뿌리 같은 존재입니다. 그녀가 심은 미나리가 후반부에 가장 생명력 있게 자라나는 장면은, 비록 순자가 병을 얻고 말도 잃었지만, 그녀가 남긴 ‘생명력’은 땅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미나리는 성장하는 데 있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관리도 필요 없고, 잡초처럼 자랍니다. 이는 이민자의 삶이 화려하거나 극적인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고요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생존과 적응의 이야기임을 상징합니다. 많은 이민자들이 그렇듯, 미나리 속 가족도 부와 명예를 이루지 않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하면서 삶을 이어갑니다. 그 중심에는 미나리처럼 평범하지만 강인한 뿌리가 있습니다. 미나리는 이 영화에서 그저 식물이 아니라, ‘살아낸다’는 존재의 의미 자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나리는 감정의 과잉이나 극적인 연출 없이, 상징과 정서를 통해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입니다. 물은 삶의 순환과 회복을, 땅은 정착과 투쟁을, 미나리 식물은 한국인의 정체성과 생존의 은유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징물들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영화의 철학과 감정을 이끄는 중심축입니다.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줄거리보다는 그 속에 숨겨진 자연과 인간, 땅과 생명의 상징들을 따라가보세요.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이 되고, 결국은 당신의 이야기처럼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