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여름, 재난 탈출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들고 관객을 찾은 영화 ‘엑시트’는 예상과 달리 단순한 액션 블록버스터가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은 위기 상황에서의 탈출이라는 외형을 갖추고 있으나, 그 안에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현실 문제가 녹아 있습니다. 주인공 용남이 겪는 청년실업의 고통, 가족 안에서의 소외감, 그리고 청춘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무력감은 영화 곳곳에서 현실감 있게 묘사됩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주제를 무겁게 풀기보다는 웃음과 유쾌함, 스릴을 가미한 방식으로 전달함으로써, 많은 관객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엑시트’ 속에 담긴 사회적 풍자를 청년실업, 가족관계, 자존감 회복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분석합니다.
1. 청년실업: 익숙한 설정, 현실적인 절망
영화의 주인공 용남은 ‘클라이밍 동아리 전설’이라는 과거의 타이틀 외에는 현재 특별한 직업도, 성취도 없는 인물입니다.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넣지만 번번이 떨어지고, 취업 준비는 어느새 ‘생활’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아직도 어머니의 집에서 살며, 가끔 친구의 결혼식이나 가족 모임에서 주눅 든 채 앉아 있습니다. 이 설정은 현실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처한 상황과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영화 초반부에서 용남이 한숨을 쉬며 이력서를 수정하고, 가족 행사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애매하게 대답하는 장면은 사회 초년생들이 자주 마주치는 풍경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로 인식되는지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주변의 시선은 그 감정을 더 날카롭게 만들 뿐입니다. 용남은 한때는 누구보다 빛나는 순간이 있었던 사람이지만, 그것이 현재의 실패를 덮어줄 수는 없습니다.
‘엑시트’는 이 현실을 절망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적 상상력을 통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재난 상황이 용남에게 ‘자신의 역량’을 보여줄 기회를 제공하도록 구성합니다. 그는 클라이밍 실력을 바탕으로 고층 건물을 오르내리며 구조 활동에 나서고, 주변 사람들마저 그의 행동에 감탄하게 됩니다. 이 설정은 재난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역설을 표현합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청년이 자신의 역량을 증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사회 구조 안에서 낙오자로 전락하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비판합니다. ‘엑시트’는 ‘기회를 얻지 못한 유능한 사람’이라는 설정을 통해, 취업이 단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임을 슬며시 드러냅니다. 동시에, 그것을 너무 무겁지 않게 풀어냄으로써 관객에게 현실을 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2. 가족관계: 함께 살지만 서로 모르는 존재들
‘엑시트’는 재난 영화이자 동시에 가족 드라마입니다. 용남의 가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입니다. 가족 간의 대화는 형식적이고, 웃음 뒤에는 숨겨진 갈등이 존재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지만 늘 “언제쯤 사람 구실을 하니?”라는 식의 잔소리를 반복하고, 누나와 매형은 속으로 그를 무시하면서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습니다. 겉보기에는 유쾌한 가정이지만, 그 안에는 세대 간 가치관의 차이와 기대의 무게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가족 내에서 용남은 ‘문제아’는 아니지만 ‘애매한 존재’로 취급받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감정의 거리감을 세심하게 묘사합니다. 식탁에 앉은 가족들이 대화하는 장면, 사진 촬영 중 묘하게 중심에서 밀려나는 용남의 위치 등은 인물의 위치와 심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재난이 발생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변화합니다. 위기 상황은 감정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하며, 용남은 가족을 지키는 인물로 떠오릅니다. 처음에는 ‘왜 너만 나가서 활약하느냐’는 시선도 있었지만, 그의 행동이 진정성을 드러내면서 가족들은 점차 그를 인정하게 됩니다.
특히 어머니가 용남을 구조 장면에서 눈물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장면은 단순한 감동을 넘어, “이 아이가 이렇게 큰 사람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의 인정은, 외부의 평가보다 더 중요한 자존감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결국 가족의 본질적인 의미 — 조건 없는 지지와 사랑 — 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갈등은 있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감정의 끈이 존재하며, 위기는 그것을 다시 드러내는 촉매제가 됩니다. ‘엑시트’는 이처럼 가벼운 방식으로도 충분히 가족의 중요성과 관계의 회복을 깊이 있게 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3. 무기력과 자존감: 존재의 가치를 되찾는 여정
용남은 영화 내내 ‘실패한 청년’처럼 비칩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실패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클라이밍이라는 기술을 누구보다 잘 다루고, 위기 상황에서는 침착하게 행동하며, 주변 사람들을 챙길 줄 아는 ‘잠재적 리더’입니다. 다만, 사회는 그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는 점점 자신을 무능력한 존재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자존감 결핍은 현대 청년들에게 매우 익숙한 감정입니다. 자신의 능력은 있지만, 그것이 평가받지 못하고, 사회의 틀 안에서만 자신을 규정하다 보니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이 점점 커집니다. ‘엑시트’는 이 내면의 문제를 유쾌한 서사 속에 담아냅니다.
재난 상황은 역설적으로 용남에게 ‘살아있는 느낌’을 제공합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되찾습니다. 그는 단순히 사람을 구하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구출하는 여정을 거칩니다.
특히 윤아와의 관계에서도 자존감 회복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과거에는 짝사랑에 실패했지만, 지금은 그녀와 대등한 관계로 협력하며 서로를 구합니다. 이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서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영화는 “우리 모두는 쓸모 있는 존재이며, 다만 그것을 증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는 청년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문장입니다. 무력감에 빠진 이들에게 ‘탈출’은 단지 재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무력감과 외부의 기준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엑시트’는 단순한 재난 탈출극이 아닙니다. 이는 현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청년 세대의 좌절, 가족 내 관계의 오해, 자기 존재에 대한 회의 같은 문제들을 유쾌하고도 절묘하게 녹여낸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무거운 주제를 유머와 활극으로 포장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용남이라는 인물의 여정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무너진 자존감의 회복이었으며, 그의 행동은 단지 탈출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 자기 인식의 전환, 사회의 시선으로부터의 ‘엑시트’이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는 모든 청년들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능력 있고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다. 단지, 아직 당신을 알아본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엑시트’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장 진심 어린 메시지입니다.